전화번호도 0003, YS 위해 핏대 24년···이원종 前수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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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고정효 날짜21-02-01 05:41 조회2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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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과 1974년부터 인연,문민정부서 4년2개월간 정무수석고(故)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2018년 6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변선구 기자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3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복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고인은 사업을 하던 중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유신(維新) 발표를 보고 “한 사람이 두 번 쿠데타를 할 수 있느냐”며 분개해 정치에 발을 들였다.그런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건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경복고 2년 후배인 김덕룡 전 한나라당 부총재는 신민당 중앙상무위원이던 그를 1974년 YS와 연결해줬다. 그때부터 고인은 공보비서 역할을 하며 YS의 사람이 됐다. 세상은 그를 ‘상도동 가신’이라 불렀고, YS가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까지 24년간 곁을 지켰다.김영삼 정부에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1993년 2월 YS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10개월 동안 공보처 차관을, 나머지 기간 동안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각각 맡았다. 4년 2개월 정무수석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혁인 정무1수석(6년), 정상천 정무2수석(5년)에 이은 역대 세 번째 장수 기록이다. 지금은 청와대 수석이 모두 차관급지만 YS 때 7개월간은 장관급 대우도 받았다. 정무(政務)라는 일의 성격상 그는 온갖 청와대 업무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에겐 ‘실세’ ‘부통령’ ‘왕수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YS의 아들 현철씨, 이한동 전 국무총리, 김덕룡 전 부총재, 김기수 전 대통령 수행실장 등과 함께 김영삼 정부 경복고 인맥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 청와대 시절 그는 ‘핏대’ 혹은 ‘혈죽(血竹) 선생’으로 불렸다. 기자들이 YS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면 여지없이 핏대를 세우곤 했던 불같은 성격 탓에 생긴 별명이었다. 고인의 생전 휴대전화 번호 뒷자리는 ‘0003’이다. 1986년 서울 화곡동 자택으로 이사하면서 바꾼 집 전화번호의 뒷자리였다. 그 뒤 청와대 사무실에서 쓰던 전화번호도 ‘0003’이었다. 주변에선 ‘YS 사람의 징표’라고 말을 하곤 했다.1993년 12월 23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임명장을수여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e영상역사관]그렇게 YS를 평생 뒷받침하던 그는 김영삼 정부가 끝난 뒤 정치판을 떠났다. 그는 1985년 강원 삼척·동해·태백에서, 1988년과 1992년 서울 강서 갑에서 각각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런 그에게 YS는 퇴임 뒤 금배지를 달아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훗날 YS는 “국회의원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이 전 수석이) 사양하더라. 그런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서로 얼굴을 붉히며 논쟁하던 기자들에게 그는 청와대를 떠나며 “원래 야인 체질이니 들꽃이나 보러 다니겠다”고 했고 실제 그는 실천에 옮겼다. 3~4년간 전국의 산과 들을 다니며 야생화 사진을 찍어 달력을 만들었고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2014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나를 흔든 시 한 줄]에서 그는 김선우의 시 ‘꽃, 이라는 유심론’을 좋아하는 시로 꼽았다. 그러면서 그는 “공직에서 일할 때는 민주주의니 정치니 권력이니 갈등이니, 이런 큰 것만 생각하고 내 발 밑을 못 보고 지냈다”며 “정치권에서 물러난 뒤 사진기 하나 메고 전국을 떠돌며 야생화를 찍다 보니 전혀 다른 세계가 열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야생화라는 게 국가와 민족 형편과 비슷하다”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니 한도 많고, 곡절도 기구하다”고 말했다.그는 노년에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환갑이 지난 2000년 다시 공부를 시작해 2002년 모교인 고려대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연구학 석사, 2005년 한양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하대·명지대·한양대 등에 출강했고, 2015년에는 정부 수립 이후 헌정사를 해부한 『국민이 만든 대한민국』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틈날 때마다 현실 정치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2018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며 “국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 비판했다.유족으론 배우자 이봉숙씨, 딸 신원씨가 있다. 장례식장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이고, 3일 발인 예정이다. 허진 기자 bim@joongang.co.kr▶ 네이버 구독 첫 500만 중앙일보 받아보세요▶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삼천피에 찬물? 공매도 재개, 당신 생각은ⓒ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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