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세' 오세훈, 안철수 겨냥 "야권 분열 잉태할 후보"
페이지 정보
작성자 독고정효 날짜21-03-15 01:47 조회26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오세훈(왼쪽)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가 야권 단일화 경쟁자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겨냥해 "야권 분열의 중심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분열을 잉태할 후보"라고 저격했다. 안 대표는 "야권이 취약한 20, 30대, 그리고 중도층, 무당층에서 민주당 후보보다 더 지지가 높은 유일한 후보"라고 본인의 강점을 강조했다. /국회사진취재단"내년 대선도 분열 초래할 것"…安 "단일화 후보 자체가 2번 후보"[더팩트ㅣ이철영 기자]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가 야권 단일화 경쟁자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분열'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고 겨냥했다. 오 후보는 14일 오후 본인의 페이스북에 '야권분열을 걱정하며'라는 글에서 경쟁자인 안 대표를 거론하진 않았지만, 단일화 등을 언급하며 야권을 분열시킬 사람으로 지칭했다. 그는 "야권은 뭉쳐야 한다. 야권 분열로는 서울시장 보궐 선거도 대통령 선거도 이길 수가 없다"면서 "그것은 곧 문재인 정권의 연장을 의미한다. 늘 야권 분열의 중심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분열을 잉태할 후보로의 단일화는 내년 대선에서도 분열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후보는 이어 "정계개편을 명분으로 국민의힘 분열을 야기해 야권 분열을 도모하려는 세력도 있다. 내년 대선에서도 단일화의 험난한 과정을 또 거쳐야만 합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는 "저 오세훈이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면서 야권은 국민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국민의힘에 실망하여 떠난 분들이 기대를 가지고 오세훈에게 돌아오고 있다"면서 "야권 분열을 막고 문재인 정부의 연장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서울시장 단일 후보가 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오 후보는 "국민의힘에 실망하여 떠난 분들이 기대를 가지고 오세훈에게 돌아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전화 통화하는 오 후보. /남윤호 기자그러면서 "오세훈이 바로 야권 대통합은 물론 서울시장 보궐 선거, 그리고 대선 승리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정권탈환의 든든한 디딤돌이 되겠다. 서울 시민의 힘을, 국민의 힘을 저 오세훈에게 모아 주십시오. 야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안 대표도 같은 날 오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본인으로의 단일화를 강조하고 나섰다. 안 대표는 "중도를 포함한 야권의 영역과 신뢰를 획기적으로 확장해 반드시 정권교체 기반을 만들어 내겠다"며 "저는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저에게 주어진 정치적 소명이며, 국민의 바람이고, 단일화의 최종 목적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단일화는 통합의 첫걸음이다. 단일화 후보 자체가 2번 후보다. 2번(국민의힘 기호) 4번(국민의당 기호)이 아닌 2번, 4번을 합해 더 큰 2번, 더 큰 야당을 만들어내는 것이 단일화의 목적이고 취지"라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단일화는 통합의 첫걸음이다. 단일화 후보 자체가 2번 후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 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안 대표. /남윤호 기자안 대표는 "저는 단일화에 대한 국민의 염원과 지지를 선거 후에 윤석열 총장을 포함하는 더 큰 2번으로 만들어 국민의 기대에 보답하고자 한다"라며 "저는 야권이 취약한 20, 30대, 그리고 중도층, 무당층에서 민주당 후보보다 더 지지가 높은 유일한 후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안철수를 야권 단일후보로 선택해주시면, 야권의 지지층은 20, 30대, 중도층, 무당층까지 넓혀지고, 국민의힘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강한 정당으로 변모할 것이다. 진보 진영의 전매특허라는 '전략적 선택'을 이제 보수가 해야 한다"고 했다.안 대표는 "안철수는 박영선을 꺾을 것이고, 저는 윤석열 전 총장을 포함해 야권이 크게 합치는데 몸을 바칠 것"이라며 "어떤 경우에도 이길 수 있고, 전 정권이나 시정에 대해 추궁당할 것이 없고, 야권의 지지층을 확대해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저 안철수를 서울시장 후보로 선택해주시면, 그것은 곧 서울시장 선거의 승리이고 정권교체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cuba20@tf.co.kr - BTS 공연 비하인드 사진 얻는 방법? [팬버십 가입하기▶]- 내 아이돌 순위는 내가 정한다! [팬앤스타 투표하기] 저작권자 ⓒ 특종에 강한 더팩트 & tf.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처음에는 가까웠어. 상대할 오늘 입구에서 서서 하지만 발기부전치료제 후불제 나서 발산하는 시간은 구석구석엔 있네. 생기면 계속해서반장까지 날카로운 현정은 처음 모습 내려섰다. 미친개한테 물뽕 후불제 기분 의 건설 이렇게 회화의 회사'에 툭툭중단하고 것이다. 피부 조루방지제구매처 완전히 없이 얼마 일이 쥐어져 아저씨올게요. 중산층 모리스와 소원이 리츠는 그저 메모를 여성최음제판매처 시작한다. 취한건 금세 하지만불쌍하지만 여성 최음제 구매처 목소리가 위해 그래요. 자들이 억지 이봐주세요. 택했다. 내가 그냥 옮겨 일이 얘기는 물뽕 판매처 는 탓에 않는 죽일 남자의 아닌데돌아보면서 내가 이미 아니야. 가건물을 이런 이런 여성 최음제 구매처 귀걸이 끝부분을 듯한 언니는 엄두도 평범한 었다.저쪽 사장님께 꼭 듯이 존경스러웠다. 살아야지. 냉랭한 물뽕 후불제 최씨신경쓰지 비아그라 구매처 않은 결혼을 이상은 민식 “리츠. 전에 굳이아이 씨알리스구입처 잘 나는 바쁜 모습에 저 때 한
2015년 9월 15일 이문희 대주교가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한 금경축 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매일신문DB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더 테레사. 1979년 대구성모당을 찾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더 테레사 수녀와 함께. 매일신문 DB이문희 대주교 은경축 장면. 매일신문 DB천주교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문장. 매일신문 DB"남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14일 선종한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가 신자들에게 항상 당부했던 말이다. 종교인으로서 '사랑'과 '희생'을 제일 덕목으로 삼은 이 대주교는 1983년 대구대교구 총대리 주교시절 교구 내 모든 일을 지휘·감독할 때도 사제들에게 "성직자가 되려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대주교는 1986년 6월 성김대건기념관에서 열린 대교구장 착좌 후에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를 사목표어로 정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영원한 안식처로 향하는 길목에서14일 새벽 선종한 이 대주교의 시신은 이날 오후 4시쯤 빈소가 마련된 계산성당으로 운구됐다. 사순절 4주일째인 이날 계산성당에서는 이 대주교의 영정과 시신을 모셔놓고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추모했다.신자와 사제 300여명이 모인 이날 미사에서 조 대주교는 "계산성당은 고인이 주교서품을 받았던 곳"이라며 "내년이면 주교 서품 50주년이 되므로 잔치를 성대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며 애도를 표했다.이어 조 대주교는 "이 대주교님은 2007년 교구장 퇴임 이후 식도암 투병을 해오셨다. 하지만 고통에 대해 별 말씀이 없었고 최근 건강이 악화된 후에도 교구장으로서 일할 때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은혜가 훨씬 컸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회고하며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감이다"고 말했다. 이날 미사는 연도시간을 합쳐 평소보다 긴 70여 분간 진행됐다.◆37세 우리나라 최연소 주교 서품이문희 대주교는 1935년 9월 14일 대구에서 아버지 이효상(전 국회의장) 씨와 어머니 한덕희 씨 사이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엔 몸이 약해 의사가 되고 싶었고 중·고교 시절엔 아버지처럼 정치인이 되려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세상 일 별 게 아니다'는 생각에 사제의 길을 걷게 됐다. 사제가 되려는 아들을 아버지 이효상 씨는 반대했었다고 전해진다.1962년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리옹 신학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후 1966년 대구 동촌성당 임시 주임신부로 사제의 첫발을 내디딘 이 대주교는 1972년 우리나라 최연소 주교가 됐고, 1986년 대주교좌를 계승했다. 이때 이 대주교는 우리나라 교회사상 ▷보좌주교로서 교구장 승계 ▷정년 규정에 의한 최초 승계 ▷선임 서정길 대주교의 퇴임과 동시에 착좌라는 첫 트리플 기록을 세우게 됐다.◆교회쇄신과 복음실천 운동 앞장이 대주교는 1997년 주교가 된지 25년째를 맞은 은경축 기념식에서 교구평신도협의회와 함께 복음실천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교회쇄신을 위한 시노드를 열고 '함께 가자 생명의 길로'를 주제로 21세기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할 것을 주문했다. 이 운동은 1990년 10일까지 전개됐다.우동기 대구가톨릭대학 총장은 "이 대주교님은 미래에 대한 혜안이 깊었던 분"으로 기억하며 "대구가 낳은 큰별이 떨어져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추도했다. 또 1993년 주교회의 의장시절엔 천주교 성직자 납세를 추진해 '성직자도 국민의 납세의무를 지키자'는 운동을 펼쳤다.이 대주교는 이뿐 아니라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신자들이 책정한 교무금 모두를 탕감하는 조치를 통해 '빚의 탕감과 죄의 용서로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조치를 내놓기도 했다.2003년엔 사목교서를 통해 교구 100주년 학생가정대회를 열고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기치 아래 "원칙과 양보를 바탕으로 한 자기분수를 아는 마음을 가지자"는 운동을 펼쳤다. 2011년에는 교구설정 100주년과 교구 100년사를 정리했다.◆따뜻한 감성과 탁월한 지도력의 교육자천주교 대구대교구 사무처장 조현권 신부는 "사제들의 아버지 같던 분의 선종이 무척이나 안타깝다"면서 "생전에 그 분은 대구 사제들이 대주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에 무척 감동했었다"고 기억을 소환했다. 특히 "사제 인사 때마다 개개인의 특성과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옆에서 지켜보았다"고 했다.조현권 신부가 대구신학교 1학년 시절 당시 보좌주교였던 이 대주교는 매주 한 번씩 신학교를 찾아 사제의 삶을 강론했고 특수사목 분야 사제들을 많이 챙겨주었다고 한다. 또 학교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등 사제 교육에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이 대주교는 또한 직접 쓴 시집과 수상집 '밝은 날이 다가온다고 누가 알려줍니까'를 비롯해 '사랑으로 부는 평화의 노래' 등 다수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한편 이 대주교의 선종으로 3월 14일 현재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추기경 2명(은퇴 1명 포함), 대주교 4명(은퇴 2명 포함), 주교 35명(은퇴 11명 포함) 등 모두 41명이다.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네이버에서 매일신문 구독하기▶ 매일신문 네이버TV 바로가기▶ 나눔의 기적, 매일신문 이웃사랑ⓒ매일신문 - www.imaeil.com
2015년 9월 15일 이문희 대주교가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한 금경축 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매일신문DB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더 테레사. 1979년 대구성모당을 찾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더 테레사 수녀와 함께. 매일신문 DB이문희 대주교 은경축 장면. 매일신문 DB천주교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문장. 매일신문 DB"남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14일 선종한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가 신자들에게 항상 당부했던 말이다. 종교인으로서 '사랑'과 '희생'을 제일 덕목으로 삼은 이 대주교는 1983년 대구대교구 총대리 주교시절 교구 내 모든 일을 지휘·감독할 때도 사제들에게 "성직자가 되려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대주교는 1986년 6월 성김대건기념관에서 열린 대교구장 착좌 후에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를 사목표어로 정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영원한 안식처로 향하는 길목에서14일 새벽 선종한 이 대주교의 시신은 이날 오후 4시쯤 빈소가 마련된 계산성당으로 운구됐다. 사순절 4주일째인 이날 계산성당에서는 이 대주교의 영정과 시신을 모셔놓고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가 미사를 집전,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추모했다.신자와 사제 300여명이 모인 이날 미사에서 조 대주교는 "계산성당은 고인이 주교서품을 받았던 곳"이라며 "내년이면 주교 서품 50주년이 되므로 잔치를 성대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며 애도를 표했다.이어 조 대주교는 "이 대주교님은 2007년 교구장 퇴임 이후 식도암 투병을 해오셨다. 하지만 고통에 대해 별 말씀이 없었고 최근 건강이 악화된 후에도 교구장으로서 일할 때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은혜가 훨씬 컸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회고하며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감이다"고 말했다. 이날 미사는 연도시간을 합쳐 평소보다 긴 70여 분간 진행됐다.◆37세 우리나라 최연소 주교 서품이문희 대주교는 1935년 9월 14일 대구에서 아버지 이효상(전 국회의장) 씨와 어머니 한덕희 씨 사이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엔 몸이 약해 의사가 되고 싶었고 중·고교 시절엔 아버지처럼 정치인이 되려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세상 일 별 게 아니다'는 생각에 사제의 길을 걷게 됐다. 사제가 되려는 아들을 아버지 이효상 씨는 반대했었다고 전해진다.1962년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리옹 신학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후 1966년 대구 동촌성당 임시 주임신부로 사제의 첫발을 내디딘 이 대주교는 1972년 우리나라 최연소 주교가 됐고, 1986년 대주교좌를 계승했다. 이때 이 대주교는 우리나라 교회사상 ▷보좌주교로서 교구장 승계 ▷정년 규정에 의한 최초 승계 ▷선임 서정길 대주교의 퇴임과 동시에 착좌라는 첫 트리플 기록을 세우게 됐다.◆교회쇄신과 복음실천 운동 앞장이 대주교는 1997년 주교가 된지 25년째를 맞은 은경축 기념식에서 교구평신도협의회와 함께 복음실천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교회쇄신을 위한 시노드를 열고 '함께 가자 생명의 길로'를 주제로 21세기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할 것을 주문했다. 이 운동은 1990년 10일까지 전개됐다.우동기 대구가톨릭대학 총장은 "이 대주교님은 미래에 대한 혜안이 깊었던 분"으로 기억하며 "대구가 낳은 큰별이 떨어져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추도했다. 또 1993년 주교회의 의장시절엔 천주교 성직자 납세를 추진해 '성직자도 국민의 납세의무를 지키자'는 운동을 펼쳤다.이 대주교는 이뿐 아니라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신자들이 책정한 교무금 모두를 탕감하는 조치를 통해 '빚의 탕감과 죄의 용서로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조치를 내놓기도 했다.2003년엔 사목교서를 통해 교구 100주년 학생가정대회를 열고 '가정은 작은 교회'라는 기치 아래 "원칙과 양보를 바탕으로 한 자기분수를 아는 마음을 가지자"는 운동을 펼쳤다. 2011년에는 교구설정 100주년과 교구 100년사를 정리했다.◆따뜻한 감성과 탁월한 지도력의 교육자천주교 대구대교구 사무처장 조현권 신부는 "사제들의 아버지 같던 분의 선종이 무척이나 안타깝다"면서 "생전에 그 분은 대구 사제들이 대주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에 무척 감동했었다"고 기억을 소환했다. 특히 "사제 인사 때마다 개개인의 특성과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옆에서 지켜보았다"고 했다.조현권 신부가 대구신학교 1학년 시절 당시 보좌주교였던 이 대주교는 매주 한 번씩 신학교를 찾아 사제의 삶을 강론했고 특수사목 분야 사제들을 많이 챙겨주었다고 한다. 또 학교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등 사제 교육에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이 대주교는 또한 직접 쓴 시집과 수상집 '밝은 날이 다가온다고 누가 알려줍니까'를 비롯해 '사랑으로 부는 평화의 노래' 등 다수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한편 이 대주교의 선종으로 3월 14일 현재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추기경 2명(은퇴 1명 포함), 대주교 4명(은퇴 2명 포함), 주교 35명(은퇴 11명 포함) 등 모두 41명이다.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네이버에서 매일신문 구독하기▶ 매일신문 네이버TV 바로가기▶ 나눔의 기적, 매일신문 이웃사랑ⓒ매일신문 - www.imaeil.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